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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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釜山美文化院放火事件)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띄는 방화 사건이다. 이전에도 반미주의 운동은 존재해왔으나 이 사건 이후로 반미운동을 가속화 시켰다. 일명 부미방, 부미방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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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당시 학생들은 방화만 한 게 아니라, 근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전두환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유인물을 뿌렸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인 문부식과 16명의 용의자들이 구속기소되었으며, 최기식 신부도 학생들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되었다.
소위 광주학살이라고 불리는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을 묵인함으로써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을 지지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동기가 된 사건이다. 그러나 광주 학살을 미국이 직접 지시한 사건이라는 의혹 때문에 벌어졌다는 주장도 있다.또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던 부산지역 기독교인(사건에 연루된 문부식 등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모두 참여한 범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인 부산양서협동조합 회원이기도 하였다. [1]) 한편 방화로 미국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중이던 학생 1명이 연기에 질식되어 숨지기도 했다.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성조기 소각사건(1982년 4월),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1985년 4월), 미국 대사관 방화미수 등의 반미운동이 각지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해방후 지금까지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하에 국내 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켰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제 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국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1.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2. 최후발악으로 전두환 군부정권은 무기를 사들여 북침준비를 이미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꿈꾸고 있다.
3. 진정한 통일을 원하는 민주시민들을 탄압 구속한 채, 허울 좋은 통일정책으로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지 말라.
4. 한일경제협력 등 한국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일체의 경제협상을 즉각 중단하라.
5. 88올림픽은 한국경제를 완전히 파탄 나게 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즉각 중단하라.
6. 노동자, 농민, 시민들은 더 이상 비참한 가난 속에서 시달릴 수 없다.
7.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나라.
8. 전두환 파쇼정권에 아부하는 관제언론 어용지식인들은 자폭하라.
9. 졸업정원제, 교수추천제 등으로 학원을 통제하고 있는 5·30교육정책을 즉각 철폐하라.
전두환 정권은 불순한 사상에 세뇌당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의 소행으로 몰아세웠으며, 강경진압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방화'라는 과격한 방식과 사건 현장에서 공부하던 1인의 학생 희생자가 발생함으로 해서 국민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반미주의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평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전에도 주한미군이나 미국 대사관 등 미국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반미운동의 상징적인 의미로 기억된다.
반미운동이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어온 남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한국의 국민과 국제사회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는 병력 파견도 검토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 사건 이후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대사관과 전국의 미국 문화원, 주한미군 주둔지 등 미군 관련 시설들이 대학생들의 연쇄적인 공격대상이 되는데 신호탄이 되었다. 이후 부산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한국에서의 반미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관련 판례
광주 민주화 운동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한국의 대표적 인권 변호사라는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다.[1][2]
관련 진술
- 반민주적 반민족적 현군부파쇼정권을 지탱시켜 주는 가장 큰 힘은, 정치적 기반도 경제력도, 경찰력도, 군사력도 아니며, 바로 비정상적이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과연 미국이 이땅에 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묻고 싶습니다. ……유신정권 20년 간 미국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군부정권을 지원해오지 않았습니까? ……주한미군의 허락 없이는 대규모의 병력이동이 불가능하다면, 광주사태시 수많은 공수부대요원을 광주에 투입시켜 전두환 군부가 단독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찌 우방으로 자처해온 미국이 그토록 잔인한 광주시민학살을 지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광주시민을 죽인 무기는 바로 소위 '한미군사협정'하에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사들였던 미국산 무기가 아니었겠습니다.[3]
같이 보기
- 반미주의
- 민족 해방
- 주사파
-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 강원대생 성조기 공개 소각 사건(1982년 4월)
-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 사건(82년 11월)
-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1985년)
-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1983년 9월)
- 부산 미 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 동의대 사건(1989년)
주석과 참고자료
- ↑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국가보안법위반·현주건조물방화치상·현주건조물방화예비·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범인은닉·범인도피】
- ↑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요약)
- ↑ (대구고법에 문부식이 낸 탄원서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외, 『한미관계의 재조명』, 1986. 8,, 111∼112쪽)
바깥고리
-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기사, 2007년 3월 18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 미 문화원 방화사건…미국을 바로 보다 / 정경모, 2009년 09월 01일자 한겨레 칼럼
-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 이 글은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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